기사제목 "자나깨나 나라독립" 조진규 지사 후손들 3.1운동 100주년 맞아 추모행사 벌여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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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나라독립" 조진규 지사 후손들 3.1운동 100주년 맞아 추모행사 벌여 눈길

기사입력 2019.04.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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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 정성으로 마련 뜻깊어 ··· "선조의 고귀한 뜻 후손까지 이어나갈 터"


 

조진규 지사.jpg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던 독립지사 조진규 선생(후손 조금세씨  제공 사진). 2018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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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광복절날, 趙 지사의 표창장을 장손자인 조금세씨가 대리 수상했다.(후손 조금세씨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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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이 趙 지사 추모 행사를 지내고 있다(후손 조금세씨 제공 사진)

 

지난 13일 오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서는 자그마한, 그러나 뜻깊은 '독립지사 추모' 행사가 열려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괴산리는 함안의 명소 무진정이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이름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이날 추모 행사는 함안면 출신 조진규(趙珍奎·사진)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후손들의 뜻이 오롯이 모아져 마련돼 그 의미를 더했다.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수많은 관련 이벤트들이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지만, 후손들이 직접 선조의 높은 뜻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행사를 연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날 趙 지사 추모비 정화 기념행사 마련은  지사의 후손(아들 조용태, 손자 조금세, 조민제, 조찬제, 조신제)들에 의해서다. 

아들 조용태는 한학자로 함안면 의회 의장을 역임하고 함안군 교육위원을 지냈다.

손자 조금세 前  부산 동아고 교장(학교바로세우기 전국연합 회장)은 "함안지역은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타 지역에 비해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난 곳"이라며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농민의 권익 보장을 위한 함안농민회 사건, 함안지역 청년동맹 결성과 형평사 운동 및 6.10 만세운동까지 참여한 선각자이셨다"고 회고했다.

 

실제 趙 지사는 1926년 특정계급인 백정의 차별철패와 인권, 평등을 주장하는 함안형평사분회의 의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2.조진규 지사 추모비 정화사업 기념행사2.jpg
趙 지사 추모비 정화에 참석한 후손들이 추모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다(후손 조금세씨 제공 사진)



1904년 9월 15일 함안면 괴산리 출생 ...  1941년 8월10일 마산요양소에서 향년 38세로 작고 


 

趙 지사는 1904년 9월 15일 함안면 괴산리에서 출생하여 1941년 8월10일 마산요양소에서 작고했다.  3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삶 전체는 마치 심해(深海)처럼 끝없이 깊었으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화산처럼 뜨거웠다. 

 

선생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퇴우(退憂)이다.

 

○ 1919년 3월19일 함안읍 만세운동에 참여... 경찰 주재소 및 등기소에 돌 던지고 독립만세 외쳐

 

선생은 1919년 3월19일 함안읍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군중과 함께 함안 경찰주재소 및 함안등기소에 돌을 던지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까지 평생 동안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활동 및 각종 항일 운동 주도

 

21세 때인 1925년부터 조선일보 지국장 및 주재기자, 동아일보 지국장 및 주재기자 생활을 하면서 일제탄압을 선두에서 막았다.

 

지역여론을 선도하였고 신간회 함안지회 결성에도 앞장 섰다. 

 

함안 농민조합 운동, 함안 농민조합 지세·모세 철폐운동, 함안 청년동맹 결성, 함안지역 청년회 설립, 함안 소작인 결성, 함안 형평사 운동, 소인 극단 운영, 남해 척식주식회사 함안농장 비료대금 징수사건 수습, 6.10만세사건을 주도하여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13차례에 걸쳐 각종 활동상황이 기사화되었다. 


○ 1927년 신간회 함안지회 결성 주도 

 

신간회 함안지회는 1927년 10월16일에 함안 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신간회란 -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이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 사회운동단체였다.

이후 1929년 8월 임원을 개선하고 신간회 활동을 전개했다. 새롭게 개편된 임원들은 서기장 조진규 선생을 비롯하여 신덕조, 조찬규, 손문욱, 변덕조, 박성출 선생 등이 참여하여 계몽운동, 생활과 생존권 수호운동, 반 봉건운동과 언론 출판·결사의 자유, 각종 억압법률의 철폐, 단결권, 파업권과 같은 정치문제를 다뤘다. 


○ 함안 농민조합운동 참여 .. 서울로 압송 고초겪어 

 

함안농민조합은 1926년 10월26일 조진규, 조문극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함안 소작인 조합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경제적 약자 보호에 적극 나섰던 셈이다.

 

함안 소작인 조합은 농민의 권익보호와 문맹퇴치를 목표로 농민 야학과 순회강연을 실시했다. 이후 1927년 7월16일에 함안 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함안소작인 조합'에서 '함안농민조합'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1935년 이후 농민조합 활동 중 적색농민조합 혹은 공작위원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아 조진규 선생을 비롯한 조휘식, 박승표, 김진국, 이석건, 박인호, 윤석중, 이홍구선생 등 8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다.


○ 함안지역 청년회와 청년동맹 결성 앞장 

 

함안 청년회가 재결성된 것은 1925년 11월. 재결성 당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조진규, 조한휘선생은 이후 신간회 함안지회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함안청년회는 청년들의 품성향상, 지식계발, 체육장려, 산업발달, 풍속개량의 5대 목표를 표방하면서 창립되었는데 회원간 친목도모를 주 목표로 하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숙연함마저 금치 못할 지경이다. 

 

'함안 청년동맹'은 1927년 10월30일 지금의 함안향교 광장에서 결성되었다. 함안군의 중심이 당시 함안면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1929년 4월 함안청년 동맹 군북지부, 1930년 9월20일 함안 청년동맹 가야지부 등을 각각 결성했으며, 1931년 4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창립 당시 준비위원은 선생을 비롯, 이석건, 조형대, 강대시, 이원세선생 등 35명이다. 함안의 청년운동은 물론 소년운동, 농민운동, 신간회운동,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하했고 이밖에 1930년 10월 만주지역에서 발생한 동포학살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도 개최했다.

 

1927년 9월에는 민족정기 고취와 청소년 계몽을 위한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마산소년웅변대회에 불온원고 사건으로 조진규 선생이 구금되었다. 1929년 7월에는 함안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선생이 선출되었으나 함안청년정책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 형평사 운동과 6·10 만세사건에도 참여 .. 고초 겪어 

형평사운동은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차별받고 있던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인권운동의 성격을 가졌으며 당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항일운동의 성격도 가졌다. 함안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의 연대활동을 통해 지역의 문제를 넘어 전국적인 활동에도 동참하였다. 

1923년 4월24일 진주에서 창립된 이후 1926년 4월21일 오후 4시에 '함안 형평사 분사'가 회원 20여 명이 출석하여 조진규선생의 간단한 취지 설명을 듣고 난 후 선생을 임시 의장으로 선출, 태동했다. 

6·10 사건은 1926년  조선조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행렬이 지금의 종로 3가 인근을 지날 때 중앙고 학생 이선호의 조선독립만세 삼창에 이어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친 사건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이다. 

6·10 사건때 함안에서도 조진규, 조한휘 선생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예비검속을 당하여 큰 고초를 겪게되었다.



상해로 옮겨 치열한 독립운동 전개.. 2018년 광복절 때 독립유공자 대통형 표창 추서



○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당 입당 및 38세로 요절

 

선생은 신간회 경남대표, 상해독립단 경남대표 등을 맡으면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1년부터 일제의 탄압과 억압이 심해지자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껴 1933년경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당에 입당했다.

 

1935년에는 나진, 웅기 등지에서 노동쟁의 주도 혐의로 신경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귀국하였으나 옥고와 울분이 병이 되어 1941년 8월10일 마산요양소에서 아깝게 작고했다. 

 

아들은 조용태, 손자녀는 조금세 조민제 조찬제 조신제  조경선,  증손자녀는 조홍래, 덕래, 황래, 민교, 미영, 인경이다. 

 

추모비 건립위원회가 1981년 4월 함안면 괴산리에 퇴우 조진규 지사 추모비를 건립하였고 군북면 서산서원에 있는 함안 조씨 독립유공자비에도 등재되어 있다. 2018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장손인 조금세 회장은 전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 및 운영위원, 대통령 자문 국정과제위원, 한국교총 부회장, 전국 시도 교총회장협의회 회장, 부산교총회장, 부산 사립교장회 회장, 동아고 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학교바로세우기 전국연합 회장,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부산공동 대표 등을 맡아 교육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자료제공 - 후손 조금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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