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말이산 4호분 발굴의 비밀..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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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말이산 4호분 발굴의 비밀..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주는 교훈

기사입력 2019.07.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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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왜곡·말살한 일본인... 네이버에는 '한국사학자'라 소개


 

함안_말이산고분군 4호분.png
이마니시 류라는 일본인에 의해 최초 발굴된 말이산고분군 4호분. (사진 맨앞) 불과 10여일 만에 졸속 발굴로 끝나 도굴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고분군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기 위해 발굴이 추진됐다. 

 

이마니시 류 다시.jpg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이마니시 류'. 그의 '임나일본부설'은 해방 이후 제자들을 통해 식민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돼 한국고대사의 원류로 자리잡기도 했다. 

 

◇'이마니시 류'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1875년에 태어나서 1932년에 사망한 일본의 동양사학자이다. [네이버의 지식백과]에는 그를 '한국사학자'라 소개하고 있다. 분명한 일본인인 데도 그가 '한국 사학자'라니··어찌된 일일까? 도처에 ··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수두룩하다.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4호분 1917년 10일만에 졸속 발굴  



▲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중인 경남 함안군 아라가야 말이산고분군. 맨 앞 고분이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가 발굴하다 덮어버린 4호분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 9.69m, 높이 1.67m, 폭 1.73m로 말이산고분군 중 최대급이다.ⓒ 함안군청

그는 1917년 함안군청 바로 뒷편의 말이산 4호분을 발굴하였다. 말이산고분군은 현재 '가야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등재가 추진 중이다.

 

발굴기간은 10월 1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약 10여 일간-.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의 대표선수 격인 4호분 발굴을 2주가 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진행한 것이다. 조사기간만 보면 거의 도굴수준에 가까운 '졸속 발굴'이라 지적이 나온다. 


대체로 고분군 1기를 발굴하고 유물을 수습한 후 보고서 작성과 복원까지는 대략 1년 여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면 이 일본인은 1년을 10일로 당길 경천동지할 재주라도 가졌던 걸까.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가 왜 10여 일 동안의 발굴에서 그쳤을까. 또 10여 일의 발굴에서 얻은 성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4호분에서 나온 유물은 '수레바퀴 토기'를 비롯해, 불꽃무늬토기, 두 개의 달항아리(대옹)을 비롯한 120여 점의 토기와 대도, 말갑옷 조각과 각종 말 장신구, 화살촉 등의 각종 무구류들이다. 졸속 발굴인데도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알려진 출토유물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함안군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모른다. 대단한 유물들이 4호분에서 수두룩하게 나왔다는 말들만 들려올 뿐이다. 

 

제대로 된 발굴이라면, 발굴에 따른 기록을 최소 어느 정도는 남겨야 했다. 그러나 일본인 '이마니시 류'는 유리 원판 몇 장만 남겼을 뿐 발굴기록은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4호분 발굴 '임나일본부설' 증명 위해 자행



4호분 발굴은 일제의 '어떤 의도'에서 시작됐다. 바로 '임나일본설부'의 증명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 왕권(일본사 최초의 국가)의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지배,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오늘날까지 일본이 '역사바이블'로 숭상하는 '일본서기' 흠명조 등에 뚜렷이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 는 서기 720년대에 완성되었다.  


'일본서기'는 일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이름을 짓고 또 그 지배자의 이름을 천황이라고 정하였다. 스스로 일본국을 중국과 대등한 제국로 인식한 한편,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같은 나라들을 일본국에 조공하는 제후의 나라로 간주하였다. 당연히 가야제국은 그들의 고토(옛땅)였다. 기가 막힌 왜곡이다. 말하자면 서기 720년경부터 일본은 왜곡과 조작을 일삼았다. 

 

 


◇4호분 발굴 통해 '임나일본부설' 뒷받침하는 흔적 나왔더라면 ··


  

만약 '임나일본부'설이 말이산 4호분 발굴을 통해 입증됐다면, 아니 입증될 만한 자료가 나왔더라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서둘러서,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은 채 발굴을 사실상 중도에서 중단하게 됐을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원하는 것들이 '나오지 않아서'이다. 


이 처럼, 일본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오늘날 불거진 문제처럼 보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이렇듯 오래 전부터(고대사부터) 일방적 왜곡이 이어져 오고있다. 


그러면, 그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작금에 와서 대한민국의 언론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시설한 각종 철도, 항만 등으로 인해 오늘날 발전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우리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사설을 통해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정부의 무능을 앞서서 탓한다. 심지어는 지금이 구한말 '고종때'와 같다고도 주장한다. 우리 국민들 일부도 그런 일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1965년에 맺어진 한일협정(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과거는 모두 청산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주도 하에 1951년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의 교섭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간 비밀 회담을 통해 추진됐다. 이후 14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양국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하였다. 졸속, 밀실 회담의 당시 결과가 오늘날 일본은 '종식됐다"이고 대한민국은 '민간측 피해배상은 별도이다'로 상충되고 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 역사, 미래 발목 잡는 형국



결론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역사)가 오늘날 새로운 역사 진전에 암초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 '이마니시 류'의 이론은 '식민사관'으로 해방 이후 고착된다. "한민족은 항상 편을 나누어 다툼을 벌이고 싸우기 때문에 스로로 살아가는 역량이 부족하므로 외세의 지배 하에 살아야 한다" 

 

그의 이런  '식민사관'은  오늘날끼지 역사논쟁의 빌미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사는 일에도 해당되고, 미래를 사는 먼 훗날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본인 '이마니시 류'가 자행한 도굴에 가까운 4호분 발굴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일이라 본다. 

 

후기 : 식민사관을 완성한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


이마니시 류는 1921년 이완용,박영효,권중현 등 거물 친일파들이 고문으로 위촉된 조선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 편찬에 열을 기울였다. 이른바 <식민사관>의 뿌리다. <식민사관>이란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이다.

 

<식민사관>에 따르면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 혹은 외세의 압제에서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고대사회에서 일약 근대사회로 도약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간이다. 

 

<식민사관>은 당파성론도 제기되하였다. 이 주장은 조선의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처럼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잘못된 민족성을 지닌 탓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쟁과 사화를 그 예로 들었다.

 

이 역사 조작의 주역은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가, 조선 학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주도했다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1천년간 불리워온 '삼각산' 이름 대신 '북한산'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했다. 


일본의 마지막 총독은 조선을 떠나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함안인터넷뉴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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